영국 남부 현장의 일이다. 이미 공장에서 완벽하게 만들어 로테르담을 거쳐 영국항으로 들어온 변압기의 무게는 묵직하다. 집의 구조에 맞춰 가구를 맞춤 제작해 보낸 것처럼 사이트의 변압기 위치와 방열기 위치에 맞춰 배관을 제작해서 보냈지만, 현장에 도착하기도 전 위치를 바꿔야 한단다. 이미 맞춤 가구는 배송되었지만, 집 주인이 거실 벽의 위치를 바꾸어 버린 것처럼 말이다.
발주처와 Principal Contractor가 토목 도면을 바꾸는 바람에 현장에서 치명적인 간섭이 발생했다. 변압기 메인 탱크가 소음 차단벽에 부딪히고, 파이프 지지대는 땅바닥과 어긋난다. 결국 변압기와 방열기 사이를 인위적으로 1m이상 벌려야 하는 추가 작업을 해야 한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러한 PMI(Project Manager Instruction)도 아니라, 그러한 지시를 내리면서 Contractor를 다루는 발주처와 Princial Contractor들의 태도다.
Princial Contractor는 약속한 3D 모델 데이터를 차일피일 미루더니, 급기야 우리와 상의도 없이 콘크리트 기초 높이(Plinth height)를 일방적으로 낮춰서 시공해 버렸다. 마치 인테리어 업자가 집주인 몰래 싱크대 높이를 엉뚱하게 낮춰놓은 것처럼 말이다. 싱크대가 낮아지니 하부 배수관의 각도가 나오지 않아 물이 새듯, 제어함 높이가 뚝 떨어지면서 하부 케이블이 꺾일 공간(Bending Radius)이 사라졌다. 도저히 시공이 불가능한 연쇄 불량의 시작이다. 치수가 포함된 제대로 된 도면을 달라고 수차례 독촉했으나, 돌아오는 건 묵묵부답이었다.
지시가 나오고 2개월 반 이후, 마침내 그들이 보내온 3D 모델링 파일은 어이없게도 열리지도 않는다. 파일이 깨져 있었던 것이다. 시스템 오류라는 핑계 뒤로, 그날 늦게야 겨우 제대로 된 STP 파일을 수령했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배수구나 지지대 고정 방식을 확정 짓지 못해 어물쩍거리고 있었다. 반면, 온전한 데이터를 쥔 우리 설계팀은 단 3영업일 만인 6월 5일에 최종 수정 도면 검토를 끝냈고, 일주일 후 현지 자재 발주까지 마쳤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발주처는 화살을 Contractor에게 쏜다.
“우리가 좀 늦긴 했지만 3개월이나 지연시킨 건 아니잖아요? 당신들 자재 공급 능력이 부족해서 공정이 늦어진 거 아닌지요?”
마치 배송 주소를 잘못 적어놓고 택배가 늦게 오자 택배 기사의 발걸음이 느리다고 타박하는 것 처럼, 진상이 따로 없다. 하지만 이러한 갑질에도 의연하게 단호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줘야할 것을 주지 않았으므로.
[Clause 61.1] The Employer does not provide something which he is to provide by the date for providing it shown…
그리고 조용히 아래와 같이 반박을 준비한다.
- 첫째, 이건 우리의 제작 불량이 아니라 당신들의 토목 기초 치수 오류와 소음벽 간섭으로 발생한 명백한 발주처 귀책의 설계 변경(Compensation Event)입니다.
- 둘째, 3월에 최초 문제가 터졌음에도 토목을 임의로 바꾸고 깨진 파일을 던져주다 가, 정상적인 설계를 진행할 수 있는 ‘완전하고 정합성 있는 데이터’를 준 것은 결국 2개월 반 후입니다. 70일간의 지연(Sequential Delay)의 책임은 100% 당신들에게 있습니다.
- 셋째, 그러므로 현장 파트너사의 철수 및 재투입 비용은 당연히 보상되어야 하며, 지체상금(LD)이 아니라 정당한 공기 연장(EoT)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계약 관리는 상대의 억지에 같이 목소리를 높이는 싸우기 보다는, 발주처라는 권위만 앞세우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그래서 생긴 빈 공간을 파고 드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낮춰버린 높이와 그들의 대충 일한 흔적들을 모아, 70일이라는 시간을 청구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