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C 계약이야기] PMI는 과연 당장 따라야 하는 명령일까

현장에서 설계 변경이라는 돌발 변수가 터진다. 다행히 발주처의 최종 비용 승인은 떨어졌는데, 진짜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한다. 본사의 행정절차를 거쳐야 하는 내부 결재 시스템 속에서, 정식 구매주문서(PO)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하도급사는 팔짱을 낀 채 단호하게 말한다.

“확정 PO 없이는 자재 발주도, 착공도 못 합니다.”

순식간에 대형 공기 지연과 지체상금(LD)이라는 시한폭탄의 초시계가 째깍거리기 시작한다. 그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법인 내부의 목소리가 부딪힌다.

현장을 책임지는 프로젝트 매니저는 NEC 계약서 Clause 61.1을 펼쳐 들며 당장 현장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발주처 지시(PMI)가 떨어졌고 승인도 끝났으니, 계약상 Contractor는 ‘즉시 지시를 이행(puts the instruction into effect)’해야 합니다. 본사 결재를 기다리다간 현장이 멈춥니다!”

[Clause 61.1] For compensation events which arise from the Project Manager or the Supervisor giving an instruction or changing an earlier decision, the Project Manager notifies the Contractor of the compensation event at the time of giving the instruction or changing the earlier decision. He also instructs the Contractor to submit quotations, unless the event arises from a fault of the Contractor or quotations have already been submitted. The Contractor puts the instruction or changed decision into effect.

그녀의 말은 옳다. 그것은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계약의 언어다.

반면 상업적 리스크를 방어해야 하는 나는 현실적으로 대응한다.
“우리의 잘못으로 터진 하자라면 군말 없이 즉시 고쳐야죠. 하지만 이건 클라이언트가 요구한 변경 건입니다. 하도급사의 견적을 쥐고 백투백(Back-to-Back)으로 금액을 확정하기 전까지 무조건 진행하는 것은 도박입니다. 자재 확보 기간을 핑계 대서라도 발주처에 합리적인 준비 기간을 요구하는 게 첫 번째, 그리고 우리 역시 PO를 다지고 움직여야 합니다.

현장을 살리기 위해 계약서를 맹신하는 일과, 회사를 지키기 위해 돌다리만 두드리는 일. 둘 다 맞지만, 둘 다 지금의 교착 상태를 풀지는 못한다. 리스크 관리란 결국 백색과 흑색 사이에서 가장 영리한 회색의 선을 그어주는 일이다.

한발 물러선다면,

본사의 정식 PO가 나오기 전이라도 현지의 전결 권한으로 하도급사에 임시 착공 지시서(LOI)를 발송하는 방법을 생각한다. 발주처 승인이라는 확실한 수표가 있으니, 현지의 서면 보증으로 하도급사의 멈춘 포크레인을 먼저 움직여 공기 지연을 막는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이를 통해 내부의 관료제라는 거대한 기계가 삐걱거릴 때, 현장의 시계가 멈추지 않도록 계약서의 행간 속에서 일을 움직이게 만드는 유연함을 발휘할 수 있다.

한발 나아간다면,

61.1항의 압박에 밀리지 않고 역으로 준비 기간을 요구하는 상업적 협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내 과실에는 기민하게 굴되, 남의 과실에는 ‘준비 기간’이라는 영리한 쉼표를 찍을 줄 아는 것. 이 두 가지를 이원화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커머셜의 진짜 역할이다.

결국 나는 본사에 메일을 써본다. ‘현지 전결의 임시 지시서’가 가능한지.

그리고 동시에 ‘귀책별 이원화 프로세스’라는 새로운 내부 차선을 깔아둔다.

계약 관리는 상대의 멱살을 잡거나 바이블처럼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서울의 시계와 영국 현장의 시계 그 사이에서 모두가 무사히 퇴근할 수 있도록 안전한 우회로를 뚫어주는 일이다.

내일, 째깍거리던 초시계가 멈추고 현장에 다시 시동 걸리는 소리가 들린다면 좋겠다. 영국에서 살아남으려면 계약서만큼이나 우회로 개척이 필요한 법이다. 임시를 대체할 수 있는 진짜 본사의 PO가 도착하면, 그땐 이 서글픈 직장인들과 커피나 한잔 마셔야겠다. 물론 그 커피값은 발주처가 사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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